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해금
문헌에는 혜금으로도 표기, 민간에서는 깽깽이로도 표현.
당나라 때 요하(遼河) 상류 북방 호적(胡狄)중 해(奚)부족에 속하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생겨나, 중국의 송 . 원대에 성행한 대표적인 찰현(擦絃)악기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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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유입되어 궁중의 당악과 향악연주에 사용되는 한편, 이후 민속악 연주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.
① 구조 및 제작법: 구조는 공명통 위에 58㎝ 길이의 대나무〔立竹〕를 연결하여명주실로 만든 2현을 걸고 이를 활대로 마찰하여 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.
③ 연주법: 연주는 왼손으로 음정을 찾고 오른손에 쥔 활대로 줄을 마찰하여 소리를 내는데, 연주시의 음량은 두 줄을 괴는 원산을 이동시켜 음량을 조절한다.
④ 연주곡: 고려시대에 유입된 이후 궁중음악의 향악과 당악에 두루 사용되었는데, 특이한 점은 연주법이 관악기처럼 지속음을 내기 때문에 현악기이면서도 반드시 관악에 편성되어 왔다는 것이다.해금은 독주 악기로서 큰 각광을 받지 못하다가, 20세기 이후 산조음악의 성행과 때를 같이하여 독주곡인 해금산조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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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 영희
1909∼1979.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.
본관은 충주(忠州). 경기도 평택 출신. 중요무형문화재 23호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성금연(成錦鳶)은 그의 아내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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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나라 격동기인 일제시대와 6.25전쟁, 산업화 시기 때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보존을 위해 애쓰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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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이러한 열정을 시기하던 당시의 국악계 큰 힘들에 의하여 그의 모든 업적이 사장됨은 물론, 국악계에서 퇴출당하시고, 그로인하여 심신이 쇠약하여 자기의 몸을 의탁하기위하여 가족이 있던 하와이로 가게 된다. 그리고 그 이국땅에서 쓸쓸히 작고하시게 됩니다.
작고하시기전까지 매일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길 희망하였다고 전해집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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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6년 후- 지영희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2015년 8월 평택호에 지영희 국악관을 건립하게 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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재미있는 이야기는 이곳을 방문한 문화관광 해설 사들이 아무도 없는 국악관 내 장구가 전시 되있는 곳에서 나지막한 장구소리가 들려 가보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.
이 소식을 접한 중요무형문화재 23호 지성자 선생은 “아버지가 생전의 한을 씻기 위하여 즐겨 치시던 장구를 치시고 계시다.”고 말하였고, 이러한 연유에 의하여 전통방식 그대로 추모제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.
기획 제작 더원방송