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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릴 적 우리 마을엔 무서운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.
항상 깨끗한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지팡이를 짚으며 동네를 산보 하셨다. 산보 중인 그 분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늘 야단맞을 각오를 해야 했기에 멀리서라도 그 분의 모습이 보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슬슬 피해다니기 일쑤였다.
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 분이 계셨기에 동네 질서가 잡힌 게 아닌가 싶다. 함부로 쓰레기 버리거나, 동네 우물에 물바가지를 제대로 엎어 놓지 않거나, 술 먹고 비틀거리기라도 하다가는 여지없이 혼줄이 났으니까.
학생들도 교복 단추를 하나라도 안 채웠거나 모자라도 비딱하게 썼으면 바로 혼줄이 났었다.
오죽하면 그 분 때문에 부부싸움도 제대로 못한다고 푸념하는 분들도 있었을까? 요즘 같으면 젊은이들로부터 여지없이 꼰대라 불리웠을 그 분이 오늘은 문득 그리워진다.
며칠 전 겪었던 한 가지 사건 때문이다.
나는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산다. 단독주택은 쓰레기 처리 방식이 아파트와 다르다.
매일 저녁 일몰이후 집 앞에 쓰레기를 내 놓으면 (아, 물론 분리수거도 해야 되고, 시청마크가 찍힌 종량제 봉투를 구입해서 써야 한다), 새벽 6시경 청소차와 미화원 아저씨들이 오셔서 수거해 간다.(그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.)
며칠 전 일이다. 주말 오전 11시경 집앞을 산책하고 있는데 멋진 차량 한 대가 서고 연예인처럼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한 30대 초반쯤 되는 젊은이가 내렸다.
속으로 ‘야, 우리 동네에 저렇게 잘 생긴 친구가 살았나?’라고 생각하는 순간, 이 친구 차 뒷 트렁크에서 커다랗고 시커먼 비밀봉지 하나를 꺼내더니 집 앞 작은 공원에 슬쩍 내려놓는게 아닌가?
내 참. 정말 꼰대 소리 듣기 싫었지만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.
떠나려는 젊은이를 불러 세웠다.
나: “저기요. 젊은이. 이 동네 사세요?”
젊은이: “아닙니다. (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키며) 저쪽에....”
나: “그런데 왜 쓰레기를 여기 버리고 가시나요?”
이 때부터 사태는 조금 심각해졌다.
젊은이: “내가 쓰레기 버리는데 당신이 왠 참견입니까?”
어이를 상실한 나: “아니, 쓰레기는 자기집 앞에 버려야 되고, 종량제 봉투 써야 되고, 일몰 이후에 버려야 되는 거 모릅니까?”
젊은이: “공원인데 무슨 상관이에요? 공원이 당신 겁니까?”
나: “공원이니까 더 깨끗하게 써야지요. 지키라고 만든 규칙인데, 왜 어기는 거요?”
싸울 듯이 한참을 노려보던 젊은이: “내가 더러워서 이번에는 그냥 가져갑니다. 남의 일에 상관 쫌 하지 마세요. 꼰대처럼!”
그러고는 다시 예의 그 좋은 차를 타고 휙하니 떠나 버렸다.
“꼰대처럼!” 떠나버린 청년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.
‘아,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어가는 건가?’라는 회한이 밀려들면서도, 한편으로는 ‘그래, 꼰대라 욕 먹더라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’라는 결기(?)가 솟아오르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.
동네가 좋아지려면 대한민국이 더 좋아지려면,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 기성세대보다는 더 반듯해야 하지 않을까?
한편 창의적이면서 한편 사회질서를 지키는 멋진 청년들로 가득차야 하지 않을까?
그러려면 마을마다 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?
기본질서도 안 지키고 배려도 없는 젊은이들이 있다면, 비록 꼰대라고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할 말은 하는 어른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?
우리 어른들이 꼰대라고 불리기 싫어서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?
그러면서 ‘요즘 애들’ 타령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닐까?
어릴 적 반듯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동네를 순찰(?)하시던 그 할아버지가 문득 생각나는 아침이다.
/글=박수영 전.경기도부지사 / 생활정책연구소 소장